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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숨겨진 이야기

이쁜꽃향 2008. 12. 18. 09:11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삼국사기 대무신왕 즉위 15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무신왕(고구려3대왕)과 둘째왕비의 소생으로 호동이 태어난다.
즉, 호동은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난 왕자이다.
호동은 사냥을 좋아했는데, 사냥중 옥저땅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난다.
(낙랑은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아닌 함흥지역에 있던 소국이다)
최리는 고구려왕자 신분인 호동을 자신의 딸(낙랑공주)과 연분을 맺게 하고,
호동은 아버지로부터 혼인허락을 얻기 위해 고구려로 돌아온다.
일찍부터 낙랑을 탐을 내고 있던 대무신왕은 호동의 말을 듣고,
자명고(적의 침입을 알리는 북으로 이 북때문에 낙랑을 복속하지 못했었다)를
공주가 없애면 혼인을 승낙하겠다고 한다.
호동은 은밀히 낙랑공주에게 편지를 보내고,
효와 사랑에 갈등하던 낙랑공주는 자명고를 찢어 사랑을 선택한다.
자명고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대무신왕은 낙랑으로 쳐들어가고,
낙랑왕 최리는 낙랑공주의 가슴을 찢고 고구려에 항복을 한다.
그리고, 얼마후 호동왕자도 자결을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이다.

이로써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게 종결되지만,
사실은 마지막 부분은 각색이 되어 있다.
우선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의 죽음(32년 4월)후 바로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6개월여가 지나서(32년 11월)이다.
그동안 슬퍼하다 자결한 것이겠지 하며 더 안타깝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첫째왕비와의 문제때문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기록을 요약해 보자면,
첫째왕비는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두려워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자신을 간음하려 한다는 호소를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은밀히 호동을 살펴보고, 거짓이면 벌을 받겠다고 나선다. 이에 호동은 "해명하면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 부왕을 근심케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을 한다.

자명고이야기는 낙랑국에서 고구려에 심어놓은 첩자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 첩자로 인해 낙랑국 정복에 번번히 실패하던 대무신왕이 그 첩자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호동의 자살은 첫째왕비의 모략때문이라고 보기도 하고, 호동과 첫째왕비가 불륜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즉, 현장을 목격당하자 첫째왕비는 겁탈을 당한 것으로 자신은 죄가 없음을 호소하고, 간음은 고구려사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이므로, 어짜피 호동은 죽음을 모면할 수 없게된 상황이라 첫째왕비의 죄는 덮어주고 자신만 자결을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대무신왕이 10살때 이미 귀신같은 전술을 구사했으며, 낙랑공주와의 설화에서도 보듯, 지략이 뛰어난 왕이기에, 첫째왕비의 모략에 속았을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 이들의 해석이다.

설화를 굳이 해석해야 하는가? 설화에 진실이 있을까를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부여와 고구려는 형사취수의 풍속이 있는 나라였지만,
(왕권의 세습이 왕의 여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형수나 계모의 관념이 없었던 때로 생각되므로 부사취모제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나 고구려나 간음은 사형으로 다스리는 중죄였다는 것이다.
고조선도 부인은 정조와 신의를 지켰다(婦人貞信不淫)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간음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 문화였다는 주장이 있는데(처용설화등)
그렇다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는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